[이데일리][목멱칼럼]'엑시트' 청년들의 비명

등록일 2019.09.26. 조회 953

 관객은 대중영화를 통해 민심을 읽어내고 한국의 정치사회적 현상을 통찰할 수 있다. 영화는 정서적 작용의 산물이므로 대중정서가 그 속에서 민감히 반응하고 교감한다. 그 정서를 생산하는 사회구조적 요인들이 지적인 원천으로 기능해 정치사회적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 '엑시트'의 성공은 인구에 회자하는 영화계 최대 화제 중 하나다.

 ‘엑시트’는 20대 청년세대의 분노를 분출한 저항적 작품이다. ‘엑시트’는 고스란히 청년세대의 문화를 흡수한다. 재난을 소재로 청춘 멜로, 로맨틱 코미디를 섞었다. 관객은 게임을 하듯 두 주인공의 서바이벌 상황을 관람한다. 유독 가스로 점령당한 도시에 오롯이 남겨진 남녀의 탈출기가 주된 줄거리다. 둘이 달리고 건물을 올라가는 장면은 드론영상으로 생중계되어 사람들은 그들의 안간힘을 지켜본다. 수많은 민간 유튜브 방송들이 이들을 중계하고 공중파 뿐 아니라 해적방송까지 가담한다. 해적방송, 드론 등의 방식은 20대 청년들의 대중문화 기호(sign)다.

 이 영화를 재미없게 본 관객 대다수는 공중파, 케이블을 시청하는 기성세대일거라 추측한다. 유튜브, 게임, 아프리카TV 등의 해적방송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다. 감독은 청년세대 관객들에게 콜 사인을 보내고 그들은 응수했으며 그 답변이 1000만에 가까운 흥행결과로 돌아왔다.

 충무로 영화계 후문은 제작 당시 지금과 같은 흥행결과를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 말은 역설적으로 현재 충무로가 기성세대의 낡은 관습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있으며 20대 청년세대가 환호할 만한 코드를 못 찾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엑시트’의 우화적 구조는 한국사회를 축약한다. 도시는 한국사회이고, 유독가스로 중독되어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상황은 한국사회의 부도덕과 후진성을 나타낸다. 유독가스를 분출한 장본인은 50대 화학자다. 그는 자신의 특허를 회사가 가로채자 앙심을 품고 가스를 유출한다. 지식인의 전형적인 위선적, 사회적 범죄다. 남의 피해는 아랑곳 않고 지식인이 자기만 살겠다고 벌인 행동이다.

 영화는 한국사회 지식인, 특히 정치가들의 위선과 부도덕을 반영한다. 물론 범죄는 항상 인성의 문제기도 하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이러한 범죄는 지식인이든 일반인이든 후진적 사회에서 빈번히 발생한다. 개인의 인권을 억압하는 범죄를 사회 시스템이 자행하고, 정부나 정치가는 책무를 방기한 결과다. 그래서 범죄자가 더 억울해 저지른 범죄다. 개인과 서민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국가의 일은 누가 하는가. 그건 정부관료, 정치가의 임무다. 그들이 임무에 소홀할 때 개인은 야수로 변하며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언급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사회로 들어가게 된다.

 구조에서 밀려난 청춘남녀는 현재 한국사회가 가장 소외시켜 놓은 청년세대를 상징한다. 그들은 흙수저라서 어디에서도 구원의 손길이 오지 않는다. 그곳은 그들에게 이미 더 이상 안전하고 안락한 나라가 아니다. 소위 ‘헬조선’이다. 그들은 자력으로 그곳에서 탈출해야 한다. 유독가스가 점점 높게 차오르자 보다 더 높은 건물을 향해 달려가며 백수 주인공이 말한다. “여기서 탈출하면 저렇게 높은 빌딩의 기업에 취직할거야”. 도시의 건물들은 성공의 삼각형, 즉 사회계층을 상징하며 삼각형의 꼭짓점에 해당하는 가장 높은 건물에 올라가야 설움 받지 않고 생존할 수 있다는 그릇된 자본주의 가치관을 은유한다. 기성세대가 통렬히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자신들이 뿌린 그릇된 씨앗이 얼마나 청년세대들을 오염시켜 놓았는가를. 유독가스를 풀어놓아 개인의 복수를 사회에 하는 몰지각한 기성세대부터 이들을 구출하지 않고 소외시킨 정부부터 어느 하나 기성세대가 벌인 범죄 아닌 게 없다. 지금은 어떤 기성 정치인도 청년들의 롤모델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절망과 비극의 시기다. 영화 속 청년들은 명령한다. 정치가여, 반성하고 소통하라.

정재형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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