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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34. 부자상영(父子相迎)

김호성 동국대 교수 ☞ 언론사 기사 바로보기

우리 정토사상에는 ‘부자상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극락으로 가고 있는 행자를 맞이하러 와주실 때, 그에 호응하여 염불행자 역시 아미타부처님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길에서 서로 끌어안고 반가워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왕생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호응하는 쌍방향의 관계입니다.

왕생은 일방적인 관계 아닌
서로 호응하는 쌍방향 관계
아미타부처님이 손 내밀고
행자는 예배하며 삼매 닦아

앞에서 아미타부처님의 오시는 모습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염불행자는 어떻게 할까요? 아미타부처님께서 천 명의 화불과 함께 손을 내밀어 주실 때, “행자는 저절로 자마금색의 좌대(紫金臺)에 앉아 있게 됨을 보고서는 합장하고 차수(叉手)하여 모든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그러자) 일념(一念)에 곧 저 나라의 일곱 가지 보배로 이루어진 연못에 태어났으니, 이 자마금색으로 이루어진 좌대는 큰 보배로 이루어진 꽃과 같이 하룻밤을 지나자 (꽃잎이 열리는 것처럼) 열렸다.”

자마금색의 좌대에 앉아서는 곧 극락에 왕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념’은 일종의 시간단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손가락 한번 튕기는 시간의 1/60이라고 합니다. 극락에 왕생하게 되니, 행자의 몸 역시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행자의 몸 역시 자마금색을 띄게 되고, 발밑에도 역시 칠보로 이루어진 연꽃이 있게 되었다.”

환경이 달라지면 그 환경 속에 살아가는 사람 역시 달라집니다. 그것이 풍토(風土)입니다. 우리는 이 환경을 흔히 ‘토(土)’라고 말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신(身)’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서로 깊은 영향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이를 신토불이(身土不二)라고 말합니다. 극락이라는 환경으로 변하게 되면, 당연히 그 몸 역시 더 이상 중생의 몸일 수는 없습니다. 자마금색을 띄게 되는 이유입니다.

행자가 극락에 도착해서 그 몸조차 바뀌게 되자, 다시 불보살님 쪽에서 호응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광명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과 (관음, 세지 두) 보살은 모두 광명을 놓아서 (염불)행자의 몸을 비추자, (행자의) 눈이 곧 밝게 열리고 그 전에 익힌 습관으로 말미암아서 두루 온갖 소리를 다 들으시고는 깊고 깊은 궁극적 의미를 온전히 설하였다.”

‘그 전에 익힌 습관’은 극락에 오기 전에 익힌 습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습관’이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만, 나쁜 습관이 아닙니다. 극락세계의 환경(依報)과 불보살(正報)을 관찰해 온 수행의 공덕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갖 소리’는 자연의 바람소리 물소리는 물론 새들이 우는 소리까지를 다 말합니다. 극락에서는 그러한 소리가 곧 무상, 고, 공, 무아를 설하는 법문으로 들려옵니다.

또한 ‘깊고 깊은 궁극적 의미’는 극락에 오기 전부터 이미 들었던 것이고, 지극히 높고 높은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물러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앞에서 “마음에 놀라거나 움직임이 없었다”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단순히 마음속으로 놀라지 않는 정도이거나 믿는 정도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온전히 그러한 궁극적인 의미, 즉 최상의 이치를 ‘온전히 설하고’(純說)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문을 설하고 나서는 “곧 (자마금색의) 좌대로부터 내려와서 부처님을 예배하고 합장하여 세존을 찬탄하여 이레가 지나자, 곧바로 위없이 높고 올바른 깨달음에서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게 되었다.” 극락에 가서 태어나면 곧 제8지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불퇴전(不退轉)이라는 지위가 10지 중 제8지입니다. 제8지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는 경지입니다.

“곧 능히 시방(세계)을 날아가서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을 모시고 그 모든 부처님 계신 곳에서 모든 삼매를 닦아서, 1소겁(小劫)을 지나서 다시는 태어나고 (소멸함이) 없는 진리의 자리를 얻고서 곧 바로 수기(受記)를 받는 것을 상품중생이라 한다.” 뒤로 물러서지는 않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남아 있습니다. 1소겁, 정도의 시간은 더 필요합니다. 수행은 끝이 없는 길입니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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