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메뉴

미디어동국

본문

홈 > 미디어동국 > 언론속 동국 > 칼럼

[법보신문]13. 권진(勸進)하라, 지상관(地想觀)

김호성 동국대 교수 ☞ 언론사 기사 바로보기

앞에서 두 번째 수상관과 세 번째 지상관 사이에 딱 부러지게 국경선을 긋기가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상관이 이루어지고 나면, 벌써 그때는 이미 지상관 역시도 어느 정도는 이루어 지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상관이 이루어졌을 때는 거칠게나마 극락국토의 땅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지요. 아주 미세하게 집중해서 관찰하지 않더라도, 대충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곧 삼매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효·구야·잇펜 스님 등
민중 속으로 들어가 전법
괴로움 벗어나려는 사람들
위하는 게 바로 정토불교

물론 그보다 더 세밀하게 관찰하면 할수록 더욱 쉽게 삼매를 얻을 수 있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삼매’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삼매는, 이미 우리가 다 알다시피, 선정수행과 관련된 말입니다. 정토에 왕생하는 데에는 염불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빠른 지름길일 터인데, 여기 ‘관경’에서는 삼매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염불이 나오지 않습니다. ‘관’이라는 말이나, ‘삼매’라는 말이나 다 선정과 관련됩니다.

극락국토의 땅을 관찰하는 것으로 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때, 관찰은 삼매를 얻기 위한 원인입니다. 그러나 그 역도 성립합니다. 앞에서 “만약 삼매를 얻는다면 저 나라의 땅을 보아서 분명하게 요달(了達)하리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삼매를 얻는 것이 관찰의 원인이 됩니다. 관찰이 지혜라면 삼매는 선정입니다. 지혜가 선정의 원인이 되고, 선정 역시 지혜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한 이치를 하나하나 다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다 갖추어서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수상관에서 지상관으로 이어지는 맥락을 말씀하시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지상관을 널리 널리 권진하라는 부촉(咐囑)을 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내 말을 잘 지녀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미래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렇게 (극락의) 땅을 관찰하는 법을 설할지어다.” 이것이 권진선언(勸進宣言)입니다. 설법은, 권진은 이렇게 하는 것임을 우리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불교에서 설법하시는 모든 스님들, 모든 법사님들이 설법을 마치기 전에 바로 이 말씀을 청중들에게 한다면, 그래서 청법자들로 하여금 설법자로 180도 회전하게 한다면 우리 불교는 달라질 것입니다. 권진의 불교로 탈바꿈하게 될 것입니다.

아난은 지금 부처님을 향해서 서있습니다. 부처님은 설법자이고, 아난은 청법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만 아난이 청법자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청법자이지만, 뒤로 돌아서기를 바랍니다. 180도 뒤로 돌아서서 미래의 모든 중생들을 향해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전해줄 설법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난이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아난은 권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후에는 다만 설법자만인 사람도 없고, 다만 청법자만인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오직 청법자이자 동시에 설법자인 사람들만 있습니다. 이것이 정토불교입니다. 정토불교에서 유독 원효스님이나 구야(空也)스님, 또 잇펜(一遍)스님과 같이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서 노래하고 춤추면 염불을 넓힌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바로 정토불교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미래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는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권진이라는 말이나 이러한 권진전선이 ‘관경’에서 등장하는 것도 범상한 일은 아닙니다. “만약 (극락의) 땅을 관찰하는 자는 팔십억 겁 동안 생사를 거듭하는 죄를 제거하게 될 것이며, 몸을 버리고서는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청정한 국토(淨國)에 태어날 것이니, 마음에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씀은 권진해야 할 내용입니다. 물론 굳이 지상관만의 일은 아니겠지요. 16관 전체 중 어떤 관이라도 수행하라고 전한다면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생사를 거듭하는 것은 곧 윤회입니다. 극락의 땅을 관찰하는 힘으로 팔십억 겁이라는 한없는 세월 동안 우리를 윤회하게 할 원인이 되는 죄를 제거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관찰 수행은 빛입니다. 팔십억 겁의 생사를 거듭할 죄는 어둠입니다. 80억 겁의 오랜 어둠이라도, 그것이 밝아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순간입니다. 윤회하지 않으면 왕생정토를 기약할 수 있습니다. 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면, 그러한 윤회는 거듭하지 않습니다.

지금 많은 불교인들은 궁금해 합니다. 윤회에 대해서 궁금해 합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정토불교에서는 윤회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윤회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윤회를 한다면 그 주체는 누구냐 하는 문제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논의로 세월을 보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왕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생의 길이 분명한데, 왜 윤회를 문제 삼아야 할까요? 윤회를 문제 삼지 말고, 관찰하라, 염불하라. 이렇게 정토불교에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극락의 국토를) 관찰하는 것은 올바른 관찰이라 말하고, 만약 이와 달리 관찰한다면 삿된 관찰이라 말한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